CURATOR’s VOICE 권영우 Various Whites

권영우

3.16∼4.30 국제갤러리

전민경 | 국제갤러리 대외협력 디렉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특별했던 점은 권영우 화백의 개인적인 면면을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소위 선비스타일의 인물이었을 것 같다. 시대와 쉽게 타협하지 않고 온건하지만 강직하고 때로는 소탈하고 섬세한 로맨티스트 같다. 이러한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과 성격의 일단을 파악하는 일은 중요하다. 지난 몇 년간 단색화로 총칭되는 작가들과 그들의 주요 작품이 미술시장에서 각광받았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나 이들 개개인에 대한 연구는 시장의 관심도에 비해 부족했다. 한 시대를 기반으로 형성된 일련의 미술적 모멘텀(momentum)을 편의상 혹은 관례적으로 ‘단색화’라 부른다. 하지만 작가들은 그 누구보다 자신들의 서사를 알리고 싶어 한다. 단색화 명칭에 대해서 파고든다면 너무 이야기가 복잡해질 수 있으므로 함구하고 요는 권영우를 단색화 작가라기보다 동시대에 ‘재발굴(rediscovery)되는 작가’의 측면에서 볼 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전 생을 돌아보면 그는 특정 그룹에 연합되어 활동한 적이 없다. 친밀하게 교유한 제자나 작가들을 제외하곤 대체로 작가로서의 외길인생을 걸어왔다. 권영우 화백의 이러한 면모는 그가 개인적으로 쓴 친필편지를 통해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가족들에게 쓴 편지를 통해 파리로 떠나와 작업하는 열정적인 작가의 모습 그 이면을 느낄 수 있다. 삶의 많은 부분을 정리하고 아내에게 경제 활동을 일임한 가장의 모습과 작가의 필연적인 정서적 외로움과 분투하는 생각 등. 또한 그가 생전에 한 인터뷰 및 영상 기록들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때문에 이번 국제갤러리의 권영우 개인전 〈Various Whites〉에서 그의 아카이브를 본격적으로 구현하고 주요 사료들을 재구성한 바 나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생전의 언급들을 발췌해서 권영우 화백에 대한 내 나름의 navigate를 해 보고 싶다.
미술학교에 다닐 적 학교에서 배운 것이, 소위 과거에서부터 내려오는 어떤 전통적인 동양화였는데, 그런 것이 제 체질에 맞지 않았어요. 그래서 ‘난 내 것을 해야 되겠다’ 하는 방향으로 자꾸 나가다 보니 우연히 하얀 종이로 돌아옵디다. (동양화를 전공했기에) 화선지라고 하는 하얀 종이가 늘 내 주위에 있었고, 그 때는 모든 재료가 귀했어요. 화판 하나를 내가 만들고 땜질해서 뚫어진 데를 고치고 하다 보니까 어떨 때는 화선지를 갖다 바르기도 했고요. 그런데 땜질하려고 가져다 붙인 화선지들이 이루어내는 그 어떤 나름대로의 하모니랄까? 아주 재미난 걸 발견한 거죠. ‘아, 이거 참 재미있다.’ 그 때부터 종이 붙이는 작업을 시작한 거예요.
최근 그가 국내를 넘어 해외에 소개될 때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지점은 종이에 대한 (당시로서는) 실험적 시도들이다. 늘 그렇듯 특별한 발견은 대부분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다. 하얀 종이, 우리는 화선지를 (그가 언급한 대로) “하얀 종이”로 느끼기보다 재질적으로 인지 한다는 점에서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재료와 기법에 관한 고민이 ‘화선지’라는 질료 자체에 대한 탐구로 귀결된 것은 납득이 간다. 권영우가 손톱으로 긁고, 칼로 선을 그어 종이를 찢어 내고 펀치로 구멍을 뚫은 일련의 행위는 어쩌면 수묵화 혹은 시서화 같은 전통적인 동양화에서 오랫동안 무수한 반복과 오랜 수련을 통해 몸과 정신을 수양해야 한다는 묵계를 향한 반항적인 접근이 짐작된다. 설사 그가 행한 시도들이 반항적이지 않았다한들 찢겨진 이미지들 자체가 주는 심상은 비교적 거칠고 야성적이다. 이 불규칙한 정렬을 아이러니한 하모니로 구현한 모습은 그가 지닌 섬세하지만 고집 센 완고한 기질을 상기시킨다.
65  -   6년경이었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때가 내 나름대로 내 영역을 개척했다 하는 의미에서 발표를 처음 시도한 것이 신세계백화점 안에 있는 미술관에서 제1회 개인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전시는) 지금까지 그런 그림의 형태와 다른 종이만 가지고 다루는 그림을 그렸었습니다 그림을 그렸다기보다는 만들었었죠. 이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이게 동양화냐 별소리가 많았죠. 동시에 소위 말하는 추상적인 것 비구상적인 그림이었기 때문에 이것은 서양화 아닌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중략  …. 그런데 저 나름대로 생각할 적에는 회화이지 동양화 서양화란 구별을 굳이 두지 말자. 그것이 기름 물감으로 그렸건, 서양화적인 화법으로 그렸건, 여는 그 작품이 발산하는 어딘가 그 체취가 동양적인 것을 발산할 적에 그것은 동양화다, 저는 그렇게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규정짓기를 좋아한다. 나 또한 업무를 보며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라는 식의 명쾌한 결론에 대한 압박을 자주 받는다. 하지만 창작의 영역에서 이러한 요구는 생산자인 작가에게 상당히 폭력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 어쩌면 작가에게 흑백 논리는 상당 부분 무의미하다. 처음부터 답을 정해놓고 무언가를 추구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많은 창작자가 본인이 예측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발견과 조우하길 기대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식의 요구에 피로감을 느끼지만 권영우 화백의 언급에서 이런 나의 비평적인 생각을 좀 더 지혜롭게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물어보기에 앞서 작품의 체취를 느끼고 작품을 논해야하는데 나의 경우 미술과 가까운 현장에서 일을 할 때 오히려 습관적 관점을 유지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아직 많은 경우 내용보다 형식에 대한 고민이 앞서기 때문인 듯싶다. 내용 자체는 개인에게 필연적이기에 추가로 말을 보태기가 어렵다. 그러나 전문성을 갖춘 형식을 추구하다보면 간혹 그 이면에 있는 정서를 상실하곤 한다. 논리적으로는 묘사하기 어려운 심상적, 감각적 이미지들이 존재하는데 때로는 탁월한 언어적 묘사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 체취를 위한 여유를 좀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우연한 기회랄까요, 국전에 계속 출품을 하다가, 국전에서 물론 특선도 됐고, 또 나중에 심사위원도 했습니다만, 초대작가 중에서 선정하는 초대작가상이라는 게 있었는데, 그것을 74년도에 수상했습니다. 당시에 외국에 나간다는 것 자체도 쉬운 일이 아니었었는데 외국의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여행을 할 수 있는 그런 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75년에 파리로 출국하여 약 1년여 머물며 지냈습니다. 당시 그 작업을 한 십 년 하던 차에 파리로 가면서, 채색이 시작된 거죠. 처음엔 조심스럽게 채색을 화면 뒤에다 발랐습니다. 그럼 화선지라고 하는 것은, 흡수하는 성질이 있거든요? 앞으로 빨아 당깁니다. 그러면 겉에다 확 바른 것보다는 은은하게 이것이 젖어 나오죠. 그런 효과를 많이 사용했었죠. 뚫은 데다가 나오게 하기도 하고, 칼로 찢어가지고 그 사이로만 나오게 하고, 그러한 변화들을 많이 찾았었죠.
권영우 화백은 이후 약 10여 년간 파리에 체류했다. 작가에게 그 시간은 채색 작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시기이다. 이전에 하던, 단색화의 전신으로 불리는 백색화와 비교해 보다 회화의 규격도 보다 커지고, 그만의 고유한 먹색, 청색, 간혹 마젠타가 섞인 보랏빛채색도 시도하곤 했다. 때문에 그의 1980년대는 화선지에 대한 실험에서 색채 개입이 적극적으로 이뤄진 다채로운 회화적 연구를 엿볼 수 있는 부흥의 시기라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그가 한국으로 보낸 편지가 기억에 남는다. 편지에서 그는 가족 혹은 이웃의 안부를 묻거나 현지 날씨 또는 그곳에서 지내는 모습을 묘사했는데, 특기할 점은 그가 거의 모든 편지에서 화선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는 파리에 머물며 지속적으로 화선지를 고집했고 상당한 양의 재료가 필요한 경우에는 프랑스를 방문하는 인편을 통해 재료를 조달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건, 권영우에게 화선지는 작업 행위 이전에 재료 자체가 상당히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선지 고유의 재료적 특성이 그가 표현하고자 한 여러 조건을 충족시킨 것 같다. 때문에 나는 화선지가 수분을 흡수하고 번지게 하는 실제적인 특징보다 그런 특징이 작가에게 맞닿아 있고 표현의 일환으로 소화되는 과정이 더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출발점에서부터 언제가 귀착점이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하는 일에서 늘 거기서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간다는 것, 늘 꾸준히 한다는 것, 계속 한다는 것, 그것뿐입니다.
맺음말로는 다소 고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시대 불문 불변의 진리 같다. 개인적으로는 근래의 필자 또한 되새겨야 할 말이라 인용했다. 이제는 후배 여러 명과 강의를 듣는 학생도 몇몇 생겨나는 동시에 아직 현장에선 동력을 가져다나르는 젊은 피이자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소모적인 중간자 입장에 있다. 뚜렷하게 구분되는 세대들 중간에서 비슷한 또래의 동료들과도 나누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워낙 세련된 매너를 추구하는 환경에서 이런 말들은 귀에 간지럽거나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보다 더 많은 시간과 역사를 겪은 인물에게서 전달 받는 상대적인 경험만큼 가슴 깊이 와 닿는 말이 없을 것 같다. 작고한 권영우 화백도 마찬가지다. 그가 지나온 시기에 대한 귀결로 다다른 태도가 아닐는지 싶다.

위<무제〉 한지 100×80.5cm 1980년대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